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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과거전시) 대전청년작가지원전 : START 2019
작성자 관리자













dtc 갤러리 청년작가지원전
· 전시명 : <대전청년작가지원전 : START 2019> 展
· 전시기간 : 2019. 3. 21(목) - 2019. 5. 25(일)
· 전시장소 : 대전복합터미널 DTC 아트센터 d1(2층 연결통로), d2 (동관·하차장 1층)
· 관람시간 : dtc갤러리 d1-상시전시 / d2갤러리-11:00~18:00 / 무료 관람
· 참여작가 : 김만섭, 김명준, 김수지, 남 설, 박종욱, 석민주, 양승원, 오승언, 유예지, 유예진,
윤이나, 정유빈
· 주최/기획 : 대전복합터미널(주)
· '대전청년작가지원전 : START 2019' 전시 둘러보기 >> CLICK



About Exhibition

우리 대전터미널시티 dtc갤러리는 대전미술계의 새 지평을 열고 신선하면서도 격정적인 물결을 일으키기 위해 지난 5년간 뉴프론티어를 발굴·지원하는 '이구열장학사업', 'dYap', '청년작가전' 등 후원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dtc갤러리 뉴프론티어 지원사업의 목적은 과거 대전미술의 위상을 재고하고, 미래사회의 문화예술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며 신 지평을 열고자 함입니다.

우리 지역 미술계는 1960년대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가열찬 창작의 열정은 우리 대전을 청년과 신진작가들의 산실이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이후부터 현재까지 원로와 중견 작가들의 활동은 꾸준히 유지되고 있지만, 청년과 신진작가들의 활동은 점점 축소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주요 원인 중, 대전이라는 지리적 환경적 조건에 의해 많은 신진들이 타지역으로 이동하는 원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원인은 뉴프론티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과 지원 프로그램이 점점 더 열악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전소재의 훌륭한 미술대학에서 매년 다수의 가능성을 지닌 신진들이 배출되고 있으면서도 지역기반의 신진작가들의 수가 감소하고 있고, 그 활동조차 축소되고 있는 현상을 극복할 방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입니다.

따라서 대전지역의 문화예술 젠트리피케이션을 타계하고 활기찬 새바람을 대전미술계에 지속적으로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리지역의 문화예술기관단체 및 후원 기업들은 무엇보다도 신진작가의 발굴과 육성에 힘써야하며, 이들이 외롭고 고단한 창작의 사유와 활동을 안정적 지원사업을 통해 지속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조성하는데 있어 협력과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dtc갤러리는 앞으로도 뉴프론티어를 위한 다양한 지원 및 협력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대전문화예술지평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금번 START2019 전은 지난 1년간 대전지역 소재 각 대학원 실기실과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신진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며 이들의 성장과정에 주목하여 왔고, 그 열정과 가능성이 돋보이는 참신한 신진작가들을 선발하여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예술가의 삶을 시작하는 뉴프론티어의 위풍당당한 발걸음에 큰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황찬연 _ dtc갤러리 책임큐레이터)



Artist’s Note




김 만 섭

내가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 라는 주체이다. 그 중에서도 과거로 인해 쌓여 현재이자 미래가 되어가고 있는 시공간상의 실재 ‘나’ 이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배가 고프다거나, 피곤다거나, 짜증이난다거나,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한 즉각적으로 반응이 되는 것들부터 과거의 무언가로 인해 쌓인 잠정적인 슬픔, 연민, 기쁨, 사랑 같은 것들. 객관적 사건이 주가 아닌 주관적 ‘나’ 라는 존재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다.





김 명 준

위장은 생존에 필요한 행위이다. 야생에서의 동물들은 위험한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위장술을 사용하거나 또는 기습을 통해 사냥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위장술을 사용한다. 이러한 야생을 인간이 속해있는 사회에 대입해 본다면, 우리들은 모두 생존을 위한 위장술을 펼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속 편견과 억압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스스로를 검열, 편집하여 사회로부터 위장하게 만든다.
나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내가 꾸민 수족관, 동물원가기, 조경사 아버지가 꾸민 멋진 우리 집의 정원을 무척 좋아한다. 이러한 것들은 나에게 억압의 사회를 어설프게나마 감추어주는 디즈니랜드의 역할을 해왔던 건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인터넷과 sns에서 나는 많은 자연이미지들을 수집해 왔다. 이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카피하거나 편집하고 변형시켜 현실너머의 공간을 창조한다. 나는 이 공간들을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게 표현하려 노력한다. 숭고한 자연이미지들은 나의 해석을 통해 허구의 공간으로 변형되고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인터넷의 이미지들은 실재하는 곳인지 편집되어 부유하는 유령 같은 것들인지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편집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자연스러운지 인공적인 것 인지 알 수 없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위장을 한다.





김 수 지

본인의 작품은 인간관계에서 겪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과 심리를 군중과 모호한 경계를 통해 표현한다. 인간은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며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소위 인간관계라고 한다. 깊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사람들은 감정이나 비밀을 공유하기도 하고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이 때로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중요한 인간관계가 나는 왜 이렇게 싫을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감정을 공유하고 신경 쓰다 보면 피로감이 쌓이고 불편함이 자리 잡는다. 이와 같은 감정과 심리를 군중과 모호한 경계를 통해 표현한다. 초점이 맞지 않는 듯 모호하고 애매한 사람들은 본인의 외면하고 싶은 마음 혹은 멀리서만 지켜보고 싶은 심리를 이야기한다. 서로를 신경 쓰지 않은 채 각자 자신의 일상을 사는 군중에 본인을 투사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제3의 시선에서 내적 거리감을 보여준다.





남 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책장 속 절반만 쓴 노트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글귀나 단어가 무질서하게 적혀있다.
언제 그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우스운 낙서와 함께.
비닐포장을 뜯지도 않은 책, 충동적으로 구매한 '고래의 삶과 죽음, '실크로드',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에 관한 책은 얌전히 먼지만 쌓이고 있다.
예쁜 쓰레기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둔다. 오히려 그것들을 구매한다.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멀미가 나서 향수를 사용할 수가 없다.
(…)
사상을 경계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를 경계한다. 도취감을 경계한다.
작업 속 인체는 성별을 명시하지 않는다.





박 종 욱

인간의 조건 ‘고뇌’
현대사회는 산업화와 경제의 발달로 인해 효율성과 신속성을 강조하는 경쟁사회이기도 하며,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인간은 늘 바쁘고 업무에 쫓기듯 살아간다.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의 인간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자유를 잃었으며, 고독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여기서 바로 ‘고뇌’가 등장한다.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후회와 고민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부작용도 커졌다.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확립된 모더니티는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부여했지만, 동시에 무한한 고뇌를 안겨주었다. 인간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록 자신의 행동이 잘못 될 수 있는 이유, 따라서 어떤 행동을 해선 안 될 이유 역시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모토로 근대사회가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는 만큼 용기를 잃게 되는 모순적인 문장이 되었다. <무뇌 레이스>와 <수렵> 연작은 이런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석 민 주

하루마다 다르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한편의 시나리오 같다.
나는 이러한 삶이 마치 영화와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당당하기만 할 것 같은 주인공이 한없이 작아지기도 하고, 가끔은 조연에 의해 존재감이 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행복한 일들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어쩌면 모두가 겪어 봤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나의 영화들을 작품으로 표현하였다.





양 승 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물리적 이동과 더불어 정신적, 심리적 이동을 동반한다. 이 이동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는 지극히 노마드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노마디즘>이라는 책에서 정착민의 공간을 홈 패인 공간, 유목민의 공간을 매끄러운 공간으로 표현한다. 이 두 공간을 통해 어떤 공간이 더 우월하고 우세한 공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공간이 교차하고 뒤섞여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더 나아가 우주와 닮아있다. 어떤 이는 우주를 질서의 ‘코스모스’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혼돈의 ‘카오스’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보는 우주는 질서와 혼돈이 혼재된 ‘카오스모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와 우주는 어떤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다양체의 형태, ‘카오스모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작가는 사회와 우주를 ‘카오스모제’로 바라보며 본인만의 조형적 기호와 언어를 통해 그 공간을 재해석하고 있다.





오 승 언

이런 장면을 보았다. 같은 공간에 두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둘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띄우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계속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들이 왜 그러고 있는 것인지 알 것 같다. 짐작컨대, 둘은 낯선 관계일 것이다. 낯선 이가 바로 지근거리에 자리하면 애써 무심함을 유지하지만 어색한 침묵은 피할 수 없다. 침묵은 곧 불편함으로 느껴지게 되는데 이 불편함이 싫어 웬만하면 낯선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살다보면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아니 자주 찾아온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며 나의 경험을 되살려 이러한 짐작을 하였고, 곧 그들의 모습에서 어색함과 불편함이 느껴졌다. 나도 분명 저 상황이 되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지만, 어째선지 흥미롭다. 당사자들의 간격은 거리감을 말해주고 있었고, 시선의 방향은 무심함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사실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곧 그들이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번졌다.
그들이 왜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이유를 알 것 같지만,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이토록 타인을 불편해하는 것일까? 왜 서로를 소외시키는 것일까? 그 답은 알 것 같으면서도, 어째선지 명황해지지 않는다.





유 예 지

시작은 악몽이었다.
유년시절 겪었던 일들이 나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밤마다 꿈속에 누군가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법뿐 이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나만의 도피처가 필요했다.
기억은 이미 과거의 것이지만 결코 과거에만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내면으로 깊이 스며들어 삶 속에서 꾸준히 충동하고 자극한다.
즉 기억이 현재의 지각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강력하다.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말처럼,
나는 작품을 통해 유년시절의 겪었던 경험의 기억을 이미지로 형상화 하여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유 예 진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며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고, 사람들은 그 경쟁 속에서 불안과 긴장을 느끼며 살아간다. 경쟁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려 하지만 오히려 보여주기에만 급급하게 되어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는 상실되어 가고 있다. 결국 현대인들에게 물질사회가 준 풍요로움은 사회와 자신과의 이질감을 느끼게 하고, 인간은 그 속에서 심리적으로 고립되면서 자신만의 이상향을 갈망하게 된다. 나의 작업은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감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자신만의 이상세계인 유토피아를 자각하고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며,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면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각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나의 작업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자아상실의 결과로부터 자아를 회복하고 개인의 감성과 꿈을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윤 이 나

식물, 동물, 돌 등 자연의 모습을 관찰하고, 단순화하여 추상적인 선의 형태로 표현한다. 구체적인 공간 또는 대상을 묘사하기 보다는, 선으로 가득 찬 화면을 구축하고자 한다. 무 작위적인 선묘형태의 이미지는 몽환적인 유형으로 구조화되며, 모호한 상태로 화면 위를 부유한다. 추상적인 선들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덮어 씌우는 과정을 통해 이상향에 가까운 공간을 구성한다. 작업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일상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적 탈출구와 같은 상상의 공간인 것이다.





정 유 빈

어릴 적 나의 주거공간은 세 개의 책상, 두 개의 침대, 혹은 바닥의 한가득 깔린 이불이 전부였고, 그 공간은 언니와 동생이 늘 함께였다. 이사를 가면서 두 개의 새로운 공간이 생겼는데 너무도 당연하게 남동생이 하나의 공간을 가져갔다. 그렇게 난 남은 공간에서 언니와 함께 지내야했고, 자취를 하는 지금도 삼남매가 같이 공간을 쓰고 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밤마다 치열한 눈치싸움을 했다. 서로 방에서 자려고, 혹은 바닥이 아닌 침대에서 자려고, 또한 생활 패턴이 달라 서로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다 반수였다. 내게 공간은 늘 누군가와 함께하는 관계의 울타리 같은 것 이였다. 어디를 가든, 어떤 장소에 있든 그 속엔 각각의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그 안에 발생하는 제약들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억눌렀다. 나는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 나만의 판타지(fantastic)한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공간에서 구조와 사물의 배치를 엇갈리게 하여 얽매였던 것들에 대한 자유와, 즐거움을 느끼고, 그 속에 진짜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공간을 구성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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